본문 바로가기
세계지리

세계지리 - 가이아나Guyana의 역사와 경제에 대해 알아보자

by 꽈순이 2023. 8. 23.
반응형

세계지리 - 가이아나Guyana의 역사와 경제에 대해 알아보자

남아메리카 북동부 해안에 있는 나라이며,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과 소규모 농지가 많은 열대기후지역입니다. 가이아나는 귀중한 광물자원, 울창한 삼림, 혐준한 산맥으로 유명합니다. 국토의 상당 부분이 접근하기 어려워 아직 탐사되지 않은 곳도 있습니다. '가이아나'는 아메리카인디언 말로 '물의땅'이라는 뜻입니다. 가이아나에는 다양한 민족과 여러 인종이 살고 있습니다. 인도계 주민과 흑인이 가장 큰 집단을 이룹니다. 

 

가이아나는 신생국가이지만 아메리카대륙에서 백인이 처음으로 정착한 지역에 속합니다. 콜럼버스가 1498년에 가이아나 해안을 따라 항해했습니다. 1581년에 네덜란드인이 지금의 가이아나에 정착촌을 건설하고 영유권을 주장했습니다. 1595년에 롤리 경이 전설적인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를 찾아내려고 이 곳을 탐사했습니다. 1831년에 영국은 영국령 기아나 식민지를 창설했습니다. 이 식민지가 1966년에 독립하여 가이아나가 되었습니다. 조지타운이 가이아나의 수도이며 가장 큰 도시입니다. 

 

 

세계지리 - 가이아나의 정치

가이아나는 의원 65명으로 구성된 의회와 대통령이 통치하는 공화국입니다. 총선에서 각 정당은 득표수에 비례해 의석수를 배정 받습니다. 따라서 가장 표를 많이 얻은 정당이 다수석을 차지하게 되며 그 당의 지도자가 대통령이 됩니다. 의회는 일반선거로 선출한 의원 53명과 지역대표로 선출한 의원 12명으로 구성됩니다. 대통령은 의회가 제정한 법률을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대통령은 총리와 내각을 임명합니다. 

세계지리 - 가이아나의 국민

인도계가 전체 국민의 절반을 약간 넘게 차지합니다. 이들은 사탕수수 농장을 경작하려고 인도에서 데려온 노동자들의 후예로 대부분 농촌에서 살며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거나 작은 농지에서 벼와 채소를 재배합니다. 그러나 많은 인도계 주민이 서서히 도시로 옮겨와 상인, 의사,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전체 인구의 약 40%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온 흑인의 후손입니다. 흑인들은 대부분 대도시 주변에서 삽니다. 이들은 주로 교사, 경찰관, 공무원 또는 설탕제조공장이나 보크사이트 광산의 숙련 노동자로 일합니다. 나머지 국민은 아메리카인디언, 유럽계, 중국계입니다. 일부 아메리카인디언은 수렵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일부는 농장을 경영하거나 목재를 벌목하여 가공, 판매하는 일을 합니다. 먼 산간지방에서 조상이 살았던 방식 그대로 사는 아메리카인디언도 있습니다. 유럽계와 중국계는 대부분 사업을 합니다. 

 

공용어는 영어이지만, 거의 모든 국민이 영어와원주민어가 섞인 크리올어를 사용합니다. 인도계는 힌디어와 우르두어를 널리 씁니다. 1950년대와 1960년 초에는 인도계와 흑인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여 정치 소요가 있었습니다. 인도계 국민은 대부분 인민진보당을 지지하고, 흑인의 거의 '인민국가회의당'을 지지합니다. 

 

대부분의 국민이 읽고 글을 쓸 줄 압니다. 6세에서 14세 사이의 어린이에게 의무교육을 실시하며,  5세에서 16세 사이의 아이들은 무상으로 교육을 받습니다. 정부에서 직접 학교를 운영합니다. 조지타운에 있는 가이아나대학교가 이 나라에서 하나뿐인 종합대학교입니다. 

 

세계지리 - 가이아나의 자연환경

가이아나는 해안평야, 내륙 삼림, 고원의 3대 지역으로 나누어집니다.

해안평야지대는 대서양 연안에 있는 가느다란 모양의 땅입니다. 너비가 3.2~48km이고 지대가 낮아서 만조 때는 해수면보다 1.2m아래에 있습니다. 그래서 방조제와 배수운하를 설치하여 바닷물이 들어조지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다. 인구의 95%가 평야지대에 삽니다. 평야지대에서는 주로 농사를 짓습니다. 사탕수수와 쌀 같은 주요 농작물을 경작하고 가공합니다. 

 

해안평야지대의 남쪽으로는 내륙 삼림지대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 지역은 국토의 약 85%를 차지하며, 1,000여 종에 이르는 나무가 자랍니다. 

 

고원지대에는 산맥과 사바나(나무가 별로 없는 초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남부와 남서부에 있는 산악지대는 일반적으로 국토의 다른 지역과 고립되어 있으며 접근하기도 어렵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대부분 산악지대에서 삽니다. 사바나지역은 남서부의 약 1만 6000k㎢를 차지합니다. 북동부에는 규모가 작은 사바나가 있습니다. 사바나지역에서는 소규모 농업과 목축업이 이루어집니다. 

 

이 나라의 4대 강인 에세퀴보강, 데메라라강, 버비스강, 코런타인강은 북쪽으로 흘러 대서양으로 빠집니다. 가이아나에는 웅장한 폭포가 여럿 있습니다. 우타시강에 있는 조지6세폭포는 높이가 488m나 됩니다. 

 

해안평야지대의 기후는 고온다습합니다. 연평균기온은 27℃이며 연강수량은 2,300mm입니다. 삼림지대는 비가 더 많이 내립니다. 고원지대와 삼림지대는 다른 지역보다 더 기온이 높습니다. 

 

세계지리 - 가이아나의 경제

농업과 광업이 이 나라의 주된 경제활동입니다. 가이아나는 비옥한 토양, 귀중한 삼림, 상당한 광물 매장량, 수력발전에 적합한 풍부한 수량을 자랑합니다. 

 

가이아나의 주요 농작물이며 수출품인 사탕수수는 대부분 대규모 농장에서 재배합니다. 해안평야에 있는 소규모 농장에서는 두 번째로 중요한 농작물인 벼를 주로 경작합니다. 감귤류, 커피, 코코아, 코코넛, 플랜틴(바나나 비슷한 과일)도 주요 농산물입니다. 

 

가이아나는 알루미늄의 소재인 보크사이트의 세계적인 생산국입니다. 그 밖에 다이아몬드, 망간, 금도 생산합니다. 전 국토의 85%가 삼림으로 뒤덮여 있어 부두를 건설하는데 사용되는 목재도 많이 생산합니다. 

 

주요 도로는 해안평야지대에 닦여 있습니다. 철도는 총길이가 130km정도입니다. 해안평야 너머 내륙에 있는 강에서는 소형선박만 운행합니다. 원양선은 데메라라강의 약 105km까지 다닐 수 있습니다. 

 

세계지리 - 가이아나의 역사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에 유럽인이 이 일대를 탐사하려 왔을 때 이 곳에는 토착 인디언인 아라와크족, 카리브족, 와라우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1581년에 네덜란드인이 지금의 가이아나지역에 처음으로 정착촌을 건설하고 영유권을 주장했습니다. 나중에 영국과 프랑스도 이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1814년, 영국이 마침내 이 일대를 차지하여 1831년에 영국령 기아나라는 식민지를 세웠습니다. 

 

초기 정착자들은 흑인 노예를 데려와서 사탕수수를 재배했습니다. 1838년에 노예제도가 철폐되자 이들은 인도에서 임금이 싼 노동자를 들여오기 시작했습니다.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영국은 영국령 기아나의 자치를 위한 준비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더 많은 사람에게 선거권을 주었고 더 많은 의회의원을 뽑았습니다. 

 

1953년에 새 헌법이 제정되어 같은 해 4월에 총선이 실시되었습니다. 인도 출신 치과 의사인 자간이 이끄는 인민진보당이 의석을 대부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1953년 10월, 헌법을 중지시키고 자간정부의 출범을 막았습니다. 자간이 집권하면 졍국령 기아나가 공산주의 국가가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간이 이끄는 정당은 1957년과 1961년에 치른 총선에서 승리하며 행정보를 장악했습니다. 

 

1961년에 영국령 가아나는 독립할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새 헌법은 식민지에 자치권을 주었고, 영국은 국방과 외교 문제만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1962년, 인도계와 흑인들 사이에 폭력사태가 발생하여 2년동안 계속되자, 영국은 영국령 기아나가 완전히 독립하기 전에 한 번 더 총선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64년, 자간정부에 맞서던 두 정당 '인민국가회의'와 '연합세력'이 의회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여 연립정부를 구성했습니다. 

 

영국령 기아나는 1966년 5월 26일에 가이아나라는 국명으로 완전히 독립했습니다. '인민국가회의'의 당수인 흑인 변호사버넘이 초대 총리로 취임하여 가장 강력한 정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1968년부터 1992년까지 버넘이 이끄는 인민국가회의가 계속 의회에서 다수석을 차지했습니다. 

 

가이아나는 1960년대 후반에 경제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 사이에 몇 번의 인종 폭동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경제 규모는 계속 늘어났고, 카리브해 국가들 사이의 경제 협력도 정력적으로 추진했습니다. 

 

1970년대에 가이아나 정부는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채택하여, 외국 회사들이 소유하고 있던 보크사이트 광산과 그 밖의 공업시설을 국유화했습니다. 또한 정부는 주요 산업을 강제로 장악했습니다. 

 

1970년대 해외에서 여러 사교 집단이 가이아나로 몰려 들었습니다. 그 중 인민사원은 가이아나 북방부 존스타운에 정착촌을 세웠습니다. 1978년에 존스 교주는 그를 추종하는 인도들에게 자살하라고 명령하여 존스를 포함한 900명 아상이 사망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다른 신도에게 타살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존스타운의 대학살'이라고 불립니다. 

 

버넘은 1980년까지 총리를 지냈습니다. 1980년에 버넘은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에 따라 대통령직은 최고 공직이 되었습니다. 버넘은 이어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버넘이 1985년에 사망하자 총리였던 호이트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호이트가 이끄는 인민국가회의는 1985년 총선거에서 승리했으며, 호이트는 새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1988년 정부는 국영회사 일부를 매각하는 경제개혁을 단행했습니다. 1992년 총선거에서는 인민진보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여 당수인 제이건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1997년에 제이건이 죽자 총리인 하인스가 대통령이 되었고, 12월에 제이건 대통령의 부인인 재닛 제이건이 새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이건은 1999년에 병으로 사망했고, 바라트자그데오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