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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지리

세계지리 - 누벨칼레도니Nouvelle-Calédonie의 경제, 교통과 통신, 교육, 정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by 꽈순이 2023.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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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지리 - 누벨칼레도니Nouvelle-Calédonie의 경제, 교통과 통신, 교육, 정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태평양 남서부에 있는 프랑스의 해오이준주입니다. 오스트레일이아의 시드니에서 북동쪽으로 2,000km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누벨칼레도니는 주도인 누벨칼레도니와 로열티제도, 벨레프제도, 팽섬과 몇개이 무인도로 구성됩니다. 주도인 누벨칼레도니에는 산이 많고 면적이 1만 6749㎢에 이르지만 나머지 섬의 총면적은 2,330㎢입니다. 
 
평균기온이 7월은 24℃이고 1월은 30℃로 맑고 화창합니다. 4월부터 11월까지는 서늘하고 건조하며,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덥고 습합니다. 
 
멜라네시아인이 전체 인구의 2/5정도를 차지합니다. 그 다음으로 많은 민족이 유럽인이며 그 밖에 인도네시아인, 폴리네시아인, 베트남인이 있습니다. 멜라네시아인이 부벨칼레도니의 원주민으로 27개 지역언어와 여러 방언을 씁니다. 멜라네시아인의 힘찬 의식춤인 필로우필로우와 로열티섬 주민의 차프차프라는 춤이 유명합니다. 
 
이 곳의 인도네시아인과 베트남인은 대부분 일찍이 계약 노동자로 온 사람들의 후손으로, 아직도 그들 고유의 관습과 생활양식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밖에 태평양의 여러 섬에서 온 많은 사람이 니켈 광산이나 제련소에서 일합니다. 
 

누벨칼레도니의 경제

누벨칼레도니의 가장 중요한 산업은 니켈 광업으로 캐나다에 이어 세계 제2의 생산국입니다. 금은 포로, 네포우이, 티오의 노천 광산에서 생산됩니다. 니켈 제련소는 누메아 교외에 있는 도니암보에 있습니다. 이 곳에서 니켈 원석의 약 80%를 제련합니다. 누벨칼레도니는 1년에 약 70만 톤의 나켈철을 생산합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산업은 관광업입니다. 1980년대 초에는 해마다 약 8만명이 이 곳을 방문했지만 정치적인 폭동으로 관광객이 줄어들었습니다. 많은 관광객이 누메아 근처의 안세바타해변에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수족관이나 일누섬에 있는 옛형무소를 방문합니다. 팽섬도 인기 있는 휴양지입니다. 가금류나 소, 염소, 돼지, 말 사육도 중요한 산업이며 코프라와 커피도 수출합니다. 
 

누벨칼레도니의 교통과 통신

정기적인 선박 운항으로 누메아와 세계 여러 곳이 연결되며, 작은 배들이 누벨칼레도니의 수로와 이웃 태평양의 섬 국가들을 항행합니다. 누메아에서 약 50km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톤토우타에 있는 현대적인 국제공항에서 여객기가 정기적으로 운행합니다. 
 

누벨칼레도니의 교육

의무교육이 실시됩니다. 절반 정도의 어린이가 사립학교에 다니며 나머지는 무상으로 공립학교에 다닙니다. 프랑스가 중등교육까지 재정을 지원하며 학생들은 프랑스어로 국가시험을 치릅니다. 수업은 프랑스어로 이루어지며 멜라네시아인 학생들을 위한 교재도 개발하고 있습니다. 
 

누벨칼레도니의 정치

프랑스 정부가 누벨칼레도니에서 프랑스 정부를 대표하는 상당한 권한을 지닌 고위 행정관을 임명합니다. 누벨칼레도니에는 주민들이 선출한 의원으로 구성된 자체 의회가 있습니다. 이 준주의회는 누벨칼레도니준주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을 검토하며 승인합니다. 또한 프랑스 정부가 직접 정하지 않는 정책 문제를 처리합니다. 
 
부벨칼레도니준주의 행정부는 최고 통치자인 대통령과 정부위원회(자문위원회)로 구성됩니다. 이들 정부위원회 위원들은 준주의회에서 선출합니다. 누벨칼레도니는 프랑스 의회에 파견할 의원을 선출해 하원과 상원에 가각 1명씩을 파견합니다. 또한 프랑스 경제사회위원회에도 대표를 보냅니다. 
 

누벨칼레도니의 역사

누벨칼레도니의 원주민은 파푸에서 온 사람들로 추측됩니다. 로열티섬의 주민들은 폴리네시아 혈통입니다. 누벨칼레도니를 방문한 최초의 유럽인은 제임스 쿡으로 1774년 9월, 이 곳 북동 해안에 있는 발라데에 도착했습니다. 
 
1843년에는 프랑스의 로마가톨릭교 선교사들이 발라데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일부 멜라네시아인의 프랑스 탐사선의 선원들을 죽인 사건이 일어나자 1853년에 프랑스 해군 준장 데스포앙테가 이섬을 점령한 후 프랑스 영토로 삼았습니다. 프랑스는 1864년부터 1897년까지 닐누섬과 팽섬을 죄수 유형지로 사용했습니다. 
 
1863년, 누벨칼레도니아에서 니켈이 발견되어 1870년에는 니켈 채광이 활발해졌습니다. 제2차세계대전 때에는 프랑스 자유군을 지지했으며 서태평양의 요지로서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서 파견된 많은 군대가 주도인 누벨칼레도니에 주둔했습니다.
 
1951년에는 정부가 계약 노동자 제도를 폐지하여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에서 노동자 1망 3000명이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1960년대 초에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프랑스 이민자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프랑스인이 멜라네시아인보다 많아지는 것을 우려해 1982년부터 격렬한 독립투쟁이 일어났습니다. 1988년에는 일부 멜라네시아인과 프랑스 관리들 사이에 폭력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 해 말에 10년 후 누벨칼레도니의 독립 여부를 결정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기고 했습니다. 1998년에 국민투표를 한 경과, 프랑스의 통치를 받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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