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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지리 - 기니비사우 Guinea Bissau의 정치, 국민, 자연환경, 경제,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by 꽈순이 2023.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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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지리 - 기니비사우 Guinea Bissau의 정치, 국민, 자연환경, 경제,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아프리카 서해안 돌출부에 자리잡고 있는 나라입니다. 앞바다에 있는 비자고스(또는 비사고스)제도도 이 나라의 영토입니다. 비사우가 수도이며 주요 항구이자 가장 큰 도시입니다. 

 

국민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습니다. 주요 농작물은 땅콩과 벼이며 열대기후지역에서 재배합니다. 기니비사우는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였습니다. 포르투갈의 식민통치에 대항해 11년간 전쟁을 치른 끝에 1974년에 독립했습니다. 

 

 

기니비사우의 정치

대통령이 행정부의 수반으로 국민이 5년마다 선출합니다. 국가인민의회가 이 나라의 입법기관으로 국민이 의회의원 100명을 선출합니다. 의원의 임기는 4년을 넘지 않습니다. 

 

1991년에 의회는 가니비사우가 다당제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내용의 헌법 개정안을 승인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기니비시우 카보베르데 아프리카 독립당'이 유일한 정당이었습니다. 

 

기니비사우의 국민

아프리카 혹인이 전체 인구의 약 85%를 차지하며, 나머지는 대부분 아프리카 흑인과 포르투갈인의 혼현인 메스티소입니다. 아프리카 흑인은 약 20개 종족으로 나뉩니다. 대표적인 종족은 규모가 큰 순으로 발란테족, 풀라니족, 만자코족, 말링케족(만딩고족으 일족)입니다. 

 

기니비사우의 국민은 대부분 농촌에 살며 농사르 짓습니다. 많은 주민이 짚을 지은 오두막에서 삽니다. 국민은 대부분 '자연 만물에 정령이 깃들여 있다'고 하는 애니미줌을 믿으며, 소수는 이슬람교를 믿습니다. 공식 언어는 포르투갈어입니다. 

 

그러나 국민은 아프리카어와 포르투갈어가 혼합된 토탁어의 일종인 크리올어를 더 많이 사용합니다. 

 

포르투갈 식민통치 기간에 기니비사우 국민은 교육을 별로 받지 못했습니다. 이 나라가 독립했을 때 전체 인구의 5%만이 글을 읽고 쓸 줄 알았습니다. 독립전쟁 중에 독립군 지도자들은 점령지역 안에 많은 학교를 세우고 성인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 새 정부는 예전의 포르투갈군 막사를 학교로 개조했습니다. 

 

기니비사우의 자연환경

기니바사우의 해안지역은 숲이 무성한 늪지대로 맹그로브들이 해안선을 따라 자랍니다. 해안에서 내륙으로 갈수록 고도가 높아져 사바나라고 부르는 초원지대가 내륙지역을 대부분 차지합니다. 많은 강이 이 나라를 가로질러 흐르며 주요 강으로는 카세우강, 코루발강, 게바강이 있습니다. 

 

기니비사우는 건기와 우기가 뚜렷한 열대후입니다. 건기는 1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이며 평균기온이 23℃이고, 우기는 6월부터 11월까지로 평균기온은 28℃입니다. 

 

7월가 8월에 집중해서 비가 내립니다. 연강수량은 해안지역이 2,410mm이고 내륙지역은 1,400mm입니다. 

 

기니비사우의 경제

기니비사우는 농업과 공업이 발달하지 않았고, 지하자원도 아직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전체 노동인구의 절반 이상이 농업에 종사합니다. 주용 농산물은 땅콩, 살, 야자열매, 옥수수, 코코넛, 콩입니다. 

 

명 안되는 산업체에서는 전체 노동자 가운데 극소수만이 일하고 있습니다. 건축업과 식품가공업이 주요 산업입니다. 땅콩, 캐슈너트, 새우를 주로 수출하며 그 밖에 바자고스제도와 해안지역에서 재배하는 야자 열매와 코코넛도 수출합니다. 주요 무역 대상국은 포르투갈입니다. 

 

전쟁이 끝난 뒤 새 정부는 국내에 필요한 식량을 충당하기 위해 농업생산 증대를 일차적인 목표로 삼았습니다. 정부에서는 새로운 토지를 개간하고 농업기술을 현대화하기 위한 사업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보크사이트, 그리, 인산염, 아연을 비롯한 지하자원도 개발했습니다. 

 

기니비사우에는 포장도로가 거의 없습니다. 대신 여러 강이 주요 수송로 구실을 합니다. 작은 비행장이 몇 군데 있습니다. 

 

기니비사우의 역사

1446년에 포르투갈 탐험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오늘날의 기니비사우지역에는 많은 아프리카 흑인 부족이 살았습니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포르투갈은 이 지역을 노예무역의 발판으로 삼았습니다.

 

1879년에 이 지역은 '포르투갈령 기니'라고 부르는 포르투갈 식민지가 되었으며 1951년에는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가 되었습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독립운동이 아프리카대륙을 휩쓸었습니다.

 

1956년에 포르투갈령 기니에 있던 아프리카 만족주의자들이 '기니비사우,카보베르데 아프리카 독립당'을 창당했습니다. 

 

카보베르데는 포르투갈령 기니에서 북서쪽으로 765km 떨어진 곳에 있는 포르투갈령 제도였습니다. 아밀카르 카브랄이 1956년부터 1973년에 암살당할 때까지 이 정당을 이끌었습니다. 

 

1960년대 초에 이 정당은 포르투갈령 기니의 농민들에게 게릴라 전술을 훈련시켰습니다. 

 

1963년에 독립전쟁을 시작해 1968년경에는 '기니비사우,카보베르데 아프리카 독립당'이 전 지역의 약 2/3를 차지했습니다. 1972년에 이 지역 주민들이 최초로 국가인민의회 의원을 선출했습니다. 그 다음 해에 의회는 이 지역이 가니비사우라는 독립국가임을 선포했습니다.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 아프리카 독립당'의 자도자이며 아밀카르 카브랄의 동생인 루이스 카브랄이 신생 국가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1974년에 포르투갈이 기니비사우의 독립을 인정함으로써 전쟁이 끝났습니다. 한편, 카보베르데는 1975년에 독립했습니다.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 아프리카 독립당'은 페레이라 사무총장의 지휘 아래 국가를 재건하고 개발하기 위한 사업을 사작했습니다. 또한 기니비사우와 카보베르데를 하나의 정부 아래 통일했습니다. 

 

1980년에 군 지도자들이 가니비사우의 민간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잡은후 의회를 해산하고 군사평의회를 설치했습니다. 군사정부는 기니비사우와 카보베르데의 통일을 무력으로 반대했습니다. 1984년에 군사정부는 새 헌법을 제정하여 새로운 의회를 구성했습니다. 의회에서는 비에이라 준장을 새 대통령으로 뽑았습니다. 

 

기니비사우는 1994년에 처음으로 다당제 선거를 실시했습니다.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 아프리카 독립당'이 간신히 과반수를 얻어 비에이라가 계속 집권하였습니다. 2000년에 쿰바 알라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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